사람의 행위에는 선과 악이 있다. 그리고 제8 아뢰야식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선. 악의 행위(선악업)의 총결과가 저장된 곳이다. 그런데 행위에는 선악이 있지만 그것의 결과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그저 그렇고 그럴 뿐이다.
이와 같이 선도 아니고 결과는 무기이므로 아뢰야식에 저장된 결과를 이숙과(異熟果)라고 한다. 인(因)과는 이시(異時). 이류(異類)의 과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여러 생을 윤회하면서 저지른 수 많은 선업 또는 악업이 각각 다르게 숙성된 것을 끌어들여서 된 것이 제8 이숙식은 사람마다 그 내실이 다르고,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자기 중심 즉 제7 말나식도 사람마다 그 모습을 달리한다.
아뢰야식은 마음이 물체와 만나서 육신이 될 때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맹목적인 생명의 흐름과도 같아서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없다고는 물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해서 단정적으로 그 무엇인가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뢰야식의 본래의 모습이다.
선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악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뢰야식이다. 이런 것을 가리켜 불교인들은 ‘그저 그렇고 그럴 뿐’ 여여(如如)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아뢰야식에는 아직 뚜렷하게 주관(見分)과 객체(相分)의 구분이 생겨나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식(識)으로서의 본질상 그 무엇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신해성(神解性)만은 잃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제8식의 심층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제7식에 있어서는 사정은 달라진다. 말나식은 본래 항상 살피고 생각(恒審思量)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작용을 하기 위하여는 그것은 우선 심층 속의 맹목적인 흐름을 가로막고서 그것에 한계를 짓지 않으면 안된다. 막연한 흐름만을 대상으로 삼고서는 아무런 사량분별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안으로 간직하고 있는 ‘여래장’은 제7 말나식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한계가 그어진다.
그러나 이와같이 한계가 그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식으로서의 그 본래적 신해성을 그대로 확보하고 있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될 것이지만, 이때의 아뢰야식은 하나의 육신이 생명체로서 그 생존을 유지해 나가는데에 필요한 각종 기관을 참으로 요묘하게 만들어 내고 있다. 이리하여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아뢰야식의 주체적 측면은 뚜렷한 것인데, 말나식은 바로 이러한 측명을 포착하여 그것을 나라고 인정한다. 심층의 속은 그저 맹목적인 생명의 흐름일 뿐이요, 무아인 것인데 제7식은 그 흐름을 고정시켜 놓고서는 그것을 ‘나’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아뢰야식 그 자체를 전체적으로 포착하여 그러한 것(法)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심층속의 충동은 유동적이어서, 그것만으로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흐름을 억지로 고정시켜 놓고서는,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심층속에 실제로는 아무런 ‘나’나 ‘것’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항상 사량분별하는 그 성질 때문에 말나식은 거기에 ‘나’와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서 그러한 생각에 집착하려고 한다. 이리하여 아집(또는 人執)과 법집이 생겨난다.
그런데 다음에 제 6의 의식은 이러한 말나식에 의하여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다. 따라서 항상 그 무엇인가에 집착기만 하려는 제7식의 잘못을 그것은 그대로 이어 받는다. 이리하여 이 육신은, 본래는 마음이 물체와 만남으로써 생겨난 것이요, 식이 변하여 그렇게 된 것일 뿐 그것 자체로서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제 6식은 이러한 육신을 가리켜 그것이 곧 ‘나’라고 인정한다.
또한 밖에 있다고 생각되는 각종 외경(外境)은 사실은 많은 사람의 아뢰야식 속에서 공통적으로 숙성되어 있는 종자가 변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업이 같은 사람은 그 식의 변함도 또한 같을 것이다. 따라서 눈앞에 보이는 산하. 대지 등은 현재 그곳에 살고있던가, 또는 앞으로 그곳에 태어날,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저장될 제8의식 속의 종자가 변하여 그렇게 된 것이므로 그 모습은 서로 비슷할 것이다.
이것은 수 많은 등불이 비치지만 하나가 비치는 것 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6식은 이러한 외경을 대하면서 그러한 ‘것’이 총체적으로든 또는 개별적으로든 그것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제7식과 제6식은 ‘아집’과 ‘법집’의 주동자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는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후자는 의식적으로 그러한 집착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경험이 풍부해지고 더 많은 것을 그가 배우게 되자, 외경에 대한 그의 생각도 그만큼 그 내용이 복잡해지고 세분되어 간다. 이리하여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가진 거대한 존재의 세계가 우리의 앞에 전개되어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외부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이 이와같이 복잡하고 다양한 것으로 되어가자, 그의 자아의식도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내용을 가지게 된다. 어린애는 손에 쥐고 있는 과자만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른은 등기부에 기재되어 있는 먼 지방의 토지까지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아집’과 ‘법집’ 즉 ‘자아의식’과 ‘외부세계이 대한 의식’, 그리고 이것들을 바탕으로 더욱 더 새분된 욕망과 시비분별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들이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크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① 그러나 본래 식은 변하는 것이요(能 變), ‘나’와 ‘것’은 그러한 식이 변하여 된것(所變)에 지나지 않는다. 식이 변하여 된 것이므로 ‘나’와 ‘것’은 가립(假立)된 것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실유(實有)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임시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假施設).
이와같이 그롯된 생각과 집착에 사로잡혀서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잡염법(雜 染法)이라고도 부르며, 이것은 인간을 고계(苦界)에로 침륜(沈淪)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에 관하여는 나중에 더 자세히 검토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