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한 삶의 시작점
번뇌의 원인에 대해 <열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몸에 집학하며 생각에도 집착한다. 몸에 집착하는 까닭에 탐심이 생기고, 생각에 집착하는 까닭에 탐심이 생긴다. 탐심이 생기는 까닭에 몸에 얽매이게 되고 생각에 얽매이게 된다. 얽애이는 것에 의해 생로병사와 근심, 슬픔 등 괴로움과 온갖 번뇌에서 떠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집착을 일러 범부라고 한다. 번뇌의 못난 사람이라고 한다."
번뇌의 원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의 참모습을 바로 알면 번뇌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육신을 자기 자신으로 알기 때문에 번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 수없이 흘러가는 생각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번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 몸을 자기 자신인 것으로 생각할 때 탐심이 생깁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이윽고 진심(瞋心)을 일으킵니다. 진심은 어리석음을 낳고 어리석음 때문에 온갖 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번뇌의 원인은 범부들이 몸을 자기라고 집착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몸을 중심으로 해서 그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에 온갖 번뇌가 생기는 것입니다. 번뇌를 통해서 업을 짓게 되고 업은 반드시 결과(과보)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근본번뇌니, 지말번뇌니 하는 것도 그 원인은 육신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데서 출발합니다. 번뇌를 통한 업력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의 인식작용은 싹트게 됩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둡게 덮고 있어서 온갖 애착의 물결이 전신세계를 적시는 것입니다. 또 교만이 물이 되어서 미혹한 견해를 키우며 마침내 열두 가지 인연(十二因緣)을 만드는 것입니다.
십이인연은 우리들 인연의 전과정을 나타낸 것입니다. 몸을 기점으로 해서 인생의 전과정을 번뇌로 뒤덮인 삶으로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맑은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흐리기 시작하면 그것은 어느 샌가 온 호수를 흐린 물로 뒤덮이게 합니다. 그래서 호수를 보는 사람은 언제부터 호수가 흐려졌는지 아니면 본래부터 흐렸었는지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범부들의 삶의 모습은 처음도, 중간도, 끝도 번뇌로 뒤덮여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번뇌의 삶입니다. 그 미혹된 삶의 시발점은 무명이며 미망입니다. 무명이나 미망은 아무것도 모르는 데서 출발합니다. 무명은 결국 육신을 자기 자신이라고 철저히 착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번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생은 하나의 몸을 갖고 있는데 번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열반경>에서 가섭(迦葉)보살이 이 문제에 대해 부처님께 여쭌 대목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람들은 한 몸을 갖고 있는데 어찌하여 갖가지 번뇌를 일으킵니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한 그룻 속에 갖가지 씨가 있어서 그것이 물이나 비를 만나면 각각 스스로 생겨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의 몸이 하나이긴 해도 애착, 집착으로 갖가지 번뇌가 자라게 되고 생기게 된다."
사실 몸은 하나이지만 몸에 대한 집착이나 애착때문에 온갖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 인연들은 번뇌를 만듭니다. 그것은 하나의 그릇 속에 씨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씨앗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내용대로 싹을 틔우고 줄기와 잎, 열매을 맺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무성한 숲을 이룹니다. 그 광경은 번뇌로 뒤덮인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의 씨앗 속에는 무량 무변한 꽃과 열매, 가지, 잎이 있습니다. 우리의 근본 무명도 그와 같아서 하나의 무명에서 온갖 무량 무변한 번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번뇌는 우리의 전체 삶을 뒤덮고야 마는 것입니다.
온갖 번뇌가 무명에서 나온다는 것은 번뇌가 마음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마음의 참 모습을 깨닫지 못한 데서 번뇌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몸의 실체가 자기 자신은 아닙니다. 몸의 실체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데서 번뇌는 싹이 트고 열매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실체가 결코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본성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진정한 자기 자신이라고 이해한다면 번뇌가 그렇게 많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면 번뇌라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일설에는 사람들이 나쁜 말을 해서 그것이 독 묻은 화살이 되어 우리의 감각기관들을 번거롭게하며 결국 그것이 즐거움을 잃게 하는 까닭에 번뇌라고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나쁜 말을 서로하게 되면 그것은 상대방의 가슴을 찔러 상처를 내게 됩니다. 상처는 온몸으로 퍼져 우리의 감각기관을 번거롭게 하여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결국 번뇌는 나쁜 해독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번뇌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심지관경(心地觀經)>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선남자여, 출가한 사람은 밤낮으로 세속의 제집을 관찰한 끝에 모두 번뇌가 낳은 곳임을 알았느니라, 가정에 따르는 여러 가지 집착이 번뇌를 낳는 것이니 번뇌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다. 나의 것이라고 하는 집착이 근본이 되어서 팔만사천 번뇌가 다투어 일어나서 집 속에 충만하게 되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생각하는 범부는 오욕락에 깊이 집착하여 처자, 권속, 노비들을 모두 갖추고 살게 되는 바 이런 인연 때문에 생로병사, 슬픔, 근심, 고뇌, 원망, 미워함을 낳게 된다."
여기서는 세속적인 삶을 부정하는 것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의 삶, 즉 처자, 권속을 거느린 사회생활을 부정적인 삶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행태의 삶이든지 간에 속된 삶, 그것은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이 번뇌를 일으킬 수밖에 없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번뇌는 결코 그냥 무시해 버려도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번뇌는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장애 요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번뇌의 원인을 바로 알아서 그 장애를 뛰어 넘을 때 진정한 삶의 모습은 찾아질 것입니다.
